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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휴정(晩 休 亭)

Kwjong 2009. 7. 26. 12:59

 

만 휴 정 (晩 休 亭)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아랫마(마을)의 서쪽 산 계곡 깊숙이 자리잡은 만휴정(晩休亭.경북도문화재자료 제173호)은

그 주변 경관과 그윽한 정취가 어울려 한폭의 동양화와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계명산을 뒤로 하고 금학산, 황학산이 첩첩이 에워싸고 있는 만휴정 계곡은 묵계동천(默溪洞天)으로 불리는 절경이기도 하다.

연산군의 폭정에 지친 보백당 김계행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설못(안동시 풍산읍 소산2리)에 조그마한 정자(보백당)를 짓고 지내다 더욱 한적한 곳을 찾아 이곳에 터를 잡았다. 1500년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세월에 닳은듯한 흰색의 너럭바위가 길게 계곡을 형성하고, 그 위로 쉴 새 없이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그 깊은 계곡은 또 바위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 계곡은 만휴정 앞에 이르러 더욱 깊은 웅덩이를 잇따라 만들고 100여m가 하나의 돌로 형성돼 있다.

황학산의 골짜기에서 흘러 내리던 계곡물은 만휴정 위쪽에 있는 24m 높이의 거대한 송암(松巖)폭포로 떨어져 용추(龍湫)와 호담(壺潭)이라 부르는 두개의 큰 웅덩이를 이룬다.
 

 큰 벼루처럼 생긴 아래쪽 웅덩이의 벽처럼 둘러진 바위에는 '보백당 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라는 큰 글씨가 행서체로 새겨져 있다. 용추와 호담 사이의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만휴정에 이른다.

김계행이 일찍이 '내 집에 보물이란 없다. 있다면 오로지 맑고 깨끗함 뿐이리(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라는 시를 짓고 이 시에서 두 글자를 따, 설못의 정자 이름과 자신의 호로 삼았던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정자는 검소하면서도 단아한 모습이다.

정면을 누마루 형식으로 개방하여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고 양쪽에는 올돌방을 두어 학문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선생은 조선초 문신으로 청백리로 뽑혔던 분으로 50세 넘어 과거에 합격한 후 대사성, 대사간, 홍문관부제학 등 여러 관직을 지내다 연산군 폭정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설못(현 소산 2리)가에 조그마한 정자(보백당)를 짓고 독서와 사색에 잠겼으나 길가인 관계로 한적하지 못하자 더욱 조용한 장소를 갖기에 이르렀고, 그렇게 얻어진 것이 오늘날의 '만휴정(晩休亭)'이다.
  

 현판들은 여럿 걸려있지만, 여기서는 동쪽 끝에 걸려있는

현판에 쓰여져 있는 시를 후에 중수하면서 김양근이 지었다는 시이다.
 
          층층이 급한 물 쏟아져 내리니             
물 돌아가는 곳에 저절로 물가마가 생겼구나
십장 높이에 옥처럼 푸른 빛 떠오르니
그 속에 신의 손길이 담긴 물건이로다

 

폭포와 연못은 가끔씩 널려있고 
너럭바위는 넓게 펼쳐져 있구나
희디 흰 것이 갈아낸 돌과 같으니
가히 백사람쯤은 앉을 수 있겠도다

앞을 보니 세 개 물가마가 어울려 있어
시흥이 날개짓으로 솟구쳐 오르네
지천으로 피어난 꽃들은 웃음을 다투고
마치 산 전체가 물 속에 든 형국이로다
 

"거묵동은 안동부 길안에 있다. 숲과 골짜기가 깊고, 물과 바위가 절승을 이룬다.

선생은 항상 그곳을 왕래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서 따로 전장을 두어 만년에 기거할 곳으로 삼았다."

 

 이 글은 원래 묵계가 거묵동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워졌으며, 김계행은 이곳의 자연이 깊고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전장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년보》에서는 묵계를 묵촌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앞부분에서는 주로 거묵, 또는 거묵동이라고 지칭한다. 김계행에게 있어서 묵계는 이렇게 일찍부터 만년을 위해 준비된 땅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김계행이 30세의 젊은 나이에 아주 묵계에 입향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32세에 성주교수를 시작으로 관리생활을 시작하는데, 45세에 충주교수를 역임하면서

아들 극인을 먼저 거묵촌에 거주하게 한다. 그러나 이때 그의 본집은 풍산 사제에 있었다.

 

그는 50세에 과거에 급제하며, 이 때로부터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에 까지 이르는 그의 본격적인 벼슬살이가 시작된다.

그의 벼슬살이는 67세까지 계속되지만, 말기에는 사직소를 올리기에 바빴다.

《년보》의 63세 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이 때부터 풍산과 묵촌 사이를 오가면서 즐기며 노닐었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김계행의 만년이 시작되며, 이 시절 이후에는 그에게 있어서 벼슬살이보다는 산간에 묻혀사는 삶이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암시라고 하겠다. 그러나 아직 그의 삶은 묵촌보다는 사제에 더 무게중심이 놓여지는 것이었다. 그의 나이 68세 되던 해에 사제의 옛집 곁에 작은 집을 짓고, 보백당이라고 편액하는 것을 통하여서 이 점은 확인된다. 그가 완전히 삶터를 묵계로 옮기는 것은 그의 나이 71세 되던 해의 일이다. 그러나 사제의 집과 보백당은 그대로 두고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71세 이후 묵계로 삶터를 옮긴다는 것은 그때로부터 87세에 임종하기 까지 그의 만년의 삶이 주로 묵계에서 펼쳐졌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묵계의 한 골짜기 속, 송암동 폭포 위에 위치하는 만휴정도 그의 만년의 삶에 있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곳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만휴정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만휴정 건립과 관계된 《년보》의 기록은 71세 때 일의 관계기록으로 나오는데, 일찌기 만휴정을 지어놓고 있었다는 이야기이지 그때 만휴정을 지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만휴정은 그의 나이 71세가 되기 이전의 어느 때인가 건립되었다고 할 수 밖에 없겠다.

 

 그러나 김계행이 지은 만휴정은 지금 우리가 보는 만휴정이 아니다.

지금의 만휴정은 처음의 만휴정이 지어진 백년쯤 뒤에 중수한 것이다.  

만휴정은 적절하게 차단되어 있는 공간이다. 앞쪽에 담이 없더라도, 만휴정의 아늑함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리라. 그러니 앞쪽 담의 가설은 사족에 불과하고, 오히려 만휴정이 갖고있는 허물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만휴정의 가장 큰 자랑인, 앞쪽을 흐르는 투명한 물과의 만남을 심리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를 행사하기 때문이다

만휴정 마루에서는 위쪽으로 계곡의 물이 너럭바위의 사면을 타고 지렁이 몸짓으로 내려와 이룬 소와, 그것이 또 태극의 형상을 지으며 짧은 유영을 한 끝에 아래쪽에 만들어 놓은 소가 내려다 보인다. 아래쪽 소의 한쪽을 칼끝처럼 비집고 들어와 사선으로 차단하고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 그러니까 보백당의 만휴정이 있는 샘의 돌이라는 글자가 횡으로 새겨져 있다. 글자들은 세월에 의해 탁마되어, 끝의 석이라는 글자는 거의 알아볼수 없을 정도이기도 하다.

벽은 회칠되어 있으나 색깔은 일정하지 않다. 백회를 칠한 곳도 있고, 시멘트를 칠한 곳도 있으며, 뒤쪽에는 그냥 흙벽을 그대로 놓아둔 곳도 있다. 마루 영역은 가장자리로 낮은 난간을 둘러쳤고, 마루 위 천장 석가래 아래쪽으로는 여기 저기 현판들이 달려있다.

 


동쪽에 있는 방 앞에 달려있는 나무판에는 겸손하고 신중하게 몸을 지키고, 충실하고 돈후하게 사람을 대하라라는 뜻의 글자가 선생의 유훈이라는 설명을 달고 쓰여져 있고, 서쪽 방의 앞 나무판에는 안내문에 나왔던 것처럼 내 집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이라면 오직 맑고 깨끗함이 있을 뿐이다라는 글씨가 선생의 집 마루 편액(보백당)은 이 뜻을 취한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쓰여져 있다.

 

글출처:http://andongji.com/andong/viewandong/content.asp?Jour_Num=244&cat1_id=18&cat2_id=297글:윤천근 만휴정이야기중에서